방송 작가  박서림 「일기와 작품」을 내면서

 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4학년(지금의 고 1)때부터였습니다. 그 해 어머니를 잃으면서부터 감상에 젖어 있던 나는 시를 읽기 시작했고,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이네''바이론'등 외국인의 시와 김억,김소월,이육사,유치환,김정호, 김기림 등의 시를 탐내어 읽곤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시라고 할 것도 없는 어설픈 시를 끄적이다 보니 그것들을 기록해 둘 공책이 필요했고,공책을 장만하다 보니 겸해서 하루 일을 기록해 두게 되었는데 그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워낙에 융통성이 없고 매사에 게으르고 소극적인 편이어서 한 가지 일을 하다가도 작심삼일(作心三日)이기 일쑤이면서도 어쩌다 한 달쯤 그 일이 계속되어 습관화만 되면 그만 두지 못하는 성격인데, 오늘까지 일기를 써온 것도 그 성격 때문인 듯 싶습니다.  
 물론 50년 동안 써 온 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6.25 전에 썼던 것들은 피란 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을 지키던 이웃 영감님이 문창호지 도배지로 사용해 공책 서너권이 남았을 뿐이고,군에서 훈련 받을 때에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간단간단한 메모와 시나부랑이 적은 것을 휴가 때 시골에 맡겨 두었더니 담배를 말아 피우고 뒷간 화장지로 요긴하게 써버린 뒤였습니다. 장교로 복무할 동안에도 일기를 좀 쓰기는 했는데 남은 것이 거의 없고 습작들도 있으나 경황없는 세월이라 남은 것은 극히 일부 뿐입니다.
 지금 보관중인 것은 6.25 전의 몇권과 군생활때의 극히 일부 그리고 56년 군에서 전역한 후의 것들인데 6.25의 상처가 미처 아물기 전이라 종이의 질이 좋지 않아 거의 가 다 삭아서 다루기 힘들 뿐더러 그 삶이 너무 초라하고 쓸모없는 기록이어서 내놓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래 1958년,'장마루 촌의 이발사'로 데뷔할 때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정리하되,주로 작가로서의 수업(修業)과정을 중심으로 하고 그 전의 일들은 따로 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수업일기를 정리하려고 결심하기까지 여러번 망설여 왔습니다.
 스스로 읽어 보아도 흡사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절로 낯이 뜨거워지는 못난 생활의 기록인데 굳이 이것을 내 보여서 뭘하나?
 일기란 어디까지나 자기 수양을 위한 단편적 반성의 기록이요, 다듬지 않고 아무렇게나 써내려간 잡문에 불과한데 읽는 이들에게 무슨 이익이 될 것인가?
 적어도 회고록이나 일기를 남기려면 그만큼 일세에 영향을 준 그런 인물이라야지 내 따위가 어디 감히 그런 반열(?)에 들 수 있단 말인가?
 ‘작가는 일기를 쓰지 말라. 오직 작품으로서만 말하라’ 는 말이 있는데 무슨 일기란 말이냐?  
 이런 회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나의 70평생 중 40여년의 기록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기록은 기록이 아닐까?  
 
반면교육(反面敎育)이라는 말이 있듯이 못난이의 기록도 워낙에 기록이 빈약한 우리 현실에서 어디엔가 한 가닥 가치가 없지 않아 있는 것이나 아닐까?
 작가도 생활인인데 생활을 기록한다 해서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내밀기도 했습니다.
 더욱 방송사(放送史) 70년에서 40여년의 세월은 비중이 작지 않습니다. 그 40여년 동안 방송계의 한 구석을 차지했던 나의 생활기록은 그 비중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다소나마 자료적 가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료적 가치를 떠나서라도 그동안 애환을 같이해 온 스승과 선배님들 그리고 동료와 후배들에게 추억거리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튼 이것은 못난이의  기록입니다. (오죽하면 제목을 ‘바보백서’라고 붙일 생각을 다 했겠습니까?)  
  이 기록을 몇조각이나마 읽고 나서 ‘참 못났다’하고 팽개쳐버리셔도 상관없습니다.
  이 기록을 읽으시고 ‘난 이렇게는 안 살 거야’하시면 충분히 반면교육의 가치는 있을 것입니다.
 이 기록을 읽으시고 ‘이 사람 보다야 내가 낫지’ 하신다면 스스로 우쭐해지고 기(氣)가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기록을 읽으시고 ‘이 사람의 세대는 고난의 세대였구나‘ 하신다면 그 깊은 이해를 감사히 여기고 큰 위로로 삼겠습니다.
 이 기록을 읽으시고 저의 방송작가 동료 후배께서 70년 방송사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다행한 일은 없겠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나는 야구를 무척 좋아합니다. 최근에 내가 만일 야구선수였다면 어떤 선수였을까? 하고 자문해 본 적이 있습니다.
 에이스 투수? 어림 없습니다. 처음부터 재질이 없었으니까요.
 포수? 어디 감히 꿈이라도 꾸겠습니까? 포수는 자기 팀 선수들을 마주 볼 수 있는 유일한 멤버로 팀을 리드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 포용력이 없습니다.
 4번 타자? 그것은 더욱 아닙니다. 어쩌다 홈.런  몇방 날렸다 해서 중심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연속 홈런을 그것도 여러해를 날릴 수 있어야 명실 공히 중심타자요 대 스타니까요. 스타는 하늘이 내린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주 후하게 보아서 7번 타자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8번은 흔히 포수가 맏고 9번은 꼴찌 같지만 1번과 연결시키는 중요한 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7번입니다. 그러나 같은 7번이라도 게으른 7번,재질은 있는데 노력이 부족해 7번 타자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면하게 팀을 위해 치고 받고 했지만 타자로서의 재질과 담력이 부족해서 7번 타자 밖에는 못 되었는데 그나마 성실해서 레귤러로 머물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제 그 7번 타자의 자리도 물러났습니다. 세상도 변하고 영특한 후진들이 너무도 많이 등장했으니까요.
 여한은 없습니다. 비록 연봉도 형편없이 가난한  7번 타자 인생이었지만 아내는 스타도 아닌 남편을 언제나 따듯하게 보살펴 주었고 자식들은 저절로 자라 일가를 이루었으니까요.
 남은 아쉬움이 있다면 불펜.캣쳐가 되어 보지 못한 점입니다.  불펜.캣쳐는 불펜에서 핏쳐의 공을 받으면서 그의 컨디션을 저울질하는 입무를 맡은 포수라고 들었습니다.그래서 경험이 많고 나이 지긋한 이가 맡는다고 합니다. 팀의 승패가 그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지요. 나는 후진들을 위해 그런 이바지도 못한 것이 아쉽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욕심이라고 치부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관객석에 물러나 앉아 발랄하게 뛰는 후진들의 게임을 관전하며 지난날을 회고하고 대리만족을 할 작정입니다.
 
이번에 장남 Dr 박이 전공이 전자통신이기도 해서 이 아비를 위해 하이텔에 홈페이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비가 하고 싶은 말, 그동안에 발표한 작품들, 미발표 작품들, 일기등 무엇이든지 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이버 공간은 무한대이니 얼마든지 실어도 된다는 것이었죠. 이 말은 방송작가  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기를 살려 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방송작품이 테입으로나마 남습니다만 옛날에는 하번 방송되면 거의가 다 공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설이나 시나 다른 문학작품들은 활자화 되어 책으로 남고 인세를 받을 수도 있지만  방송작품은 허무하게 공중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던 거죠.
그런데 그 공중에 날아간 것들을 사이버 공간인 홈페이지에 붙들어 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처럼의 기회를 나는 되도록 성실하게 활용하려고 합니다. 이 공간을 나 혼자 독점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들 손자 며느리들 (세 아들, 세 자부, 세 손자 손녀)과 함께 즐거운 대화의 장을 삼을 것이며 나의 스승. 선배, 동인들 그리고 후배들에게도 이 공간을 빛내 주시도록 부탁을 해두었습니다.
 나는 미욱합니다만 나의 스승은 훌륭하시고,선배님 동인들 그리고 후배들은 모두 스타들입니다. 나는 7번 타자를 자칭하지만 그분들은 내로라 하는 대타자요 교타자요 명투수요 명수비수들입니다. 그분들의 작품과 일화들도 우리 홈페이지에 자주 소개할까 합니다.
 아무쪼록 많은 관심 있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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