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부인   재치부인  

 

   

        「우리 만의 기념일」

 

 

 재치씨에게 고민거리 하나가 생겼다.
 달력의 3월 11일 자에 붉은 사인 펜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의 동그라미인지 도무지 생각해 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내 생일? 아내의 생일? 자신과 가족들의 생일을 모르고 있을 만큼 흐리멍덩한 재치씨가 아니다.
 결혼 기념일? 처가식구들의 무슨 행사? 아니면 제사 날? 그것도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저게 무슨 표시지?
 답답해서 바우한테까지 물어보았다.


 「바우야. 혹시 저 표시 네가 한 게 아니냐? 」

 「에이, 표시할 일이 있음, 제 방에 있는 달력에다 하지, 왜 안방에 있는 달력에다 하겠어요? 」

 

 바우도 통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밥상머리에서,

 

 「여보.」

 「네?」

 「그렇게 비밀에만 붙이지 말고 이 자리에서 공개하기로 하지.」

 「아니, 뭘 요?」

 「당신 나 테스트하려고 공개하지 않는 모양인데, 사과해야 할 일 있음 내 사과할게.」

 「어머나! 당신 사과할 짓이라도 저질렀다는 얘기세요? 」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이야? 무슨 날이 길래 달력에다 공표를 해 놓은 거야?」

 

그러자 재치부인은 눈을 크게 뜨는 것이었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바로....아이 깜빡 잊고 있었네. 」

 

자신도 깜빡 잊고 있었다는 투였다.

 

 「오늘이 도대체 무슨 날인데? 」

 「아이, 오늘 페인트 좀 사 와야겠다. 」

 「아니 여보, 오늘이 무슨 날이야고 묻고 있는데 페인트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엉뚱하게!」

 「아이참, 그래도 짐작 못하겠어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

 「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바로 우리가 이 집으로 이사 온 바로 그 날 아냐? 」

 「네, 우리만의 기념일, 이사 기념일 아녜요?」

 

벌써 12년인가? 바우가 갓난애 때 이 집을 사가지고 이사를 왔으니까. 이 집을 사가지고 이사오던 그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땐 이 동네가  이렇게까지 번화하지도 않았다. 번화한 게 다 무엇인가? 허허벌판에 50여 호, 그것도 아직 입주하지 않은 빈 집들이 많아서 밤이면 적적하다고 아내가 눈물까지 찔끔거리지 않았던가?
 그 때야 가구도 별 것 있었나?  장농 하나와 경대 조그만한 것과 라디오와 부엌살림이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냉장고, 세탁기, 가스 레인지에다 컬러 TV에서 오디오시스템까지....자가용만 빼놓고는 대강 다 갖춘 셈이 아닌가?
 1년에도 몇 번씩 집을 옮기며 돈도 벌고 집도 좋은 집으로 부지런히 개비하며 사는 약싹 바른 사람들의 눈으로는, 십 년 여일하게 지켜 온 이 집이 초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재치부인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십여 년의 온갖 비바람을 막아 주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게 해 주고, 좋은 이웃과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해 준 이 집이 그저 고맙기만 할 뿐이다.   

 이날 낮, 재치부인은 우선 집 안팎 청소부터 깨끗이 하고, 남편이 돌아오면 페인트칠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맨 먼저 남편의 문패부터 닦기 시작하였다. 어쩐 일인지 닦으면 닦을 수록 빛을 발하는 것은 문패 자체가 아니라 남편의 이름만 같았다. 이 무렵 아차부인이 찾아왔다.


 「어머나, 대청소를 하실 모양이군요? 」

 「네, 페인트칠을 좀 하려구요. 이번 주말에...」

 「아, 기술자를 부르셨군요? 」

 「기술자를 불러도 좋겠지만, 그이하고 함께 손수 칠하기로 했어요. 」

 「어머나 어려우실 텐데....」

 「오히려 즐거울 것 같은 데요?」

 「즐거우시다구요?」

 「페인트칠을 하고 있음, 이 집에서 지냈던 일들이 한가지한가지 되살아 날 것 같거든요. 」

 「아유 그러니까 추억을 더듬으며 페인트칠을 하신다.... 」

 「그렇죠. 따지고 보면 이 집이야 말로 우리 부부, 그리고 바우의 역사를 속속들이 보아온 집이 아니겠어요? 」

 「아유,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무슨 명소고적(名所古蹟) 얘기 하시는 것 같다. 」

 「어쩜 우리 식구한텐 명소고적만큼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죠.」

 「아유 허긴 그렇겠네요. 앞으로 바우아빠께서나 나아가 바우가 만인이 우러러보는 위인이 되었을 적엔 이 집이 바로 그 위인 사시던 기념관이 될지 누가 알아요? 」

 「아유, 그건 과분한 말씀이구요 호호. 」
 

 은근히 샘이 난 아차부인, 남편이 돌아오자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여보, 바우네는 오늘이 이사기념일이라고 저 북새를 떨고 있는데 우린 가만 보고만 있을 거예요?」

 「오늘이 이사 온 기념일이라고 저러고 있는 거야?」

 「네, 추억을 더듬으며 페인트칠을 하니까 고되기는커녕 즐겁기까지 하다 잖아요. 」

 「체, 일하는데 고되지 않다는 건 또 뭐람? 」

 「우린 가만히 있을 거예요?」

 「정 그렇거든 우리도 기념일 만듭시다 그려!」

 「무슨 기념일요?」

 「무슨 기념일이긴! 당신 기억 안 나? 우리가 이 집에 이사오던 날, 어느 말쑥한 친구가 인사를 청하지 않았었느냐구. 아, 오늘 이사오시는 길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앞으로 좋은 이웃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인사 드리죠. 저, 재치라고 합니다. 하고 말야!」

 「그래서요?」     

 「재치네 이사 기념일이 오늘이라면 우리 이사 기념일은 내일 모레라구. 우리도 페인트칠 시작하지 뭐, 내일 모레부터...」

 

 그러자 아차부인,  하얗게 눈을 흘기는 거이었다.

 

  「이그 이그 당신은 무슨 사람이 그래요? 개성도 하나 없이? 」

 

 이 날 저녁때였다.

 아차부인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싱크대 바로 위에 표찰 같은 게 하나

 커다랗게 붙어 있는 게 아니가?

 그 표찰에 글씨도 또렷하게  이런 구절이 씌어 있었다.

 

   -잊지 말자 3.14! 우리만의 기념일!

 

 「잊지 말자 3.14! 우리만의 기념일? 아니 이게 무슨 날이지? 3월14일, 3월 14일... 」

 

 아차부인은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여보, 무슨 날이유 3월 14일이? 」

 「당신두 어지간히 무뎌졌군! 당신하고 나하고 약혼한 날 아냐 」

 「어머나! 참 그렇구려!」

 「두고  봐. 내 그 동안, 약혼기념일은커녕 결혼기념일조차 기억해 내기 힘들었었는데, 이제부턴 약혼기념일도 꼬박꼬박 기억해 둘 테니까! 」

 「어머나 어쩜!」

 「나이 들수록 의지할 건 부부 밖에 더 있는가 베?」

 

                                    박서림 방송 꽁트집 <아차부인. 재치부인>
  

  

                                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