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부인   재치부인  

 

 

       「아내는 은인이다」

 

 

 아차씨 요즘 들어 아무래도 이상해졌다. 어쩐지 풀이 죽어 있고 모든 게 흥미없다는 투의 태도다.
 그뿐인가? 벌써 여러 날 째 술 안 마시고 들어온 날이 없다.
 더욱 의아스러운 것은 곤드레로 취해 가지고 인사불성이 된 것도 아닌데 아내 보기를 소 닭 쳐다보듯

아예 등을 돌린 채 잠이 들어버리지를 않는가.
 보통 증상인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여보, 오늘도 늦을 거예요? 」

 「응,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어요, 요즘?」

 「일은 무슨 일?」

 「근데 왜 매일같이 술은 마시고 들어와요? 뚜우허니 말도 제대로 않구? 」

 「........」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려? 있음 말해 보세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없어, 아무 일도!」

 「근데 왜 늦어요?」

 「난 늦고 싶지 않는데, 그냥 어울리게 되잖아. 」

 「빠질 수도 있잖우?」

 「그게 어디 빠질 수가 있어야지. 술자리에서 나 혼자 빠져 나오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

 「당신 건강도 좀 생각해야죠.」

 

 이쯤 되면 아차씨의 짜증이 나오기 시작한다.

 

 「아니, 왜 이렇게 깐족거려, 아침부터! 내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 남의 속을 뒤집어 놓는 거야? 응?」

 「!」

 

 예삿일이 아니다 싶어서 옆집 재치씨에게 물었다.

 

 「그 친구 요즘, 저하군 통 어울리질 않습니다. 학교 동창이나 군대 친구하고 어울리는 모양이죠?」

 

 고사리씨에게 물어보았다.

 

 「회사요? 별 일 없습니다. 아 그럼요! 지극히 펑온합니다. 」
 「고사리씨하고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네, 요 며칠 진짜, 과장님하고 술좌석을 같이 해 본 적이 없는데요? 」
 「누구하고 마신다는 얘기도 못 들으셨어요? 」
 「네, 그저 우물쭈물 누구하고 약속이 있다고 절보고 먼저 가라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

 

 아차부인은 혼자 속으로 불길한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이이가 혹시, 그 나이 해 가지고 딴 생각이라도? 」
 
 이 날 낮이었다.

 

 「과장님 안 나가십니까? 점심시간입니다. 」

 「자네들이나 먼저 나가서 먹도록 해요. 난 조용한 기회에 사적인 전화를 걸 게 있어서.... 」

 「아무리 사적인 전화라도 점심은....」

 「아 ,글쎄 먼저 나가라니까! 미스 서, 미스 서도 나가 주지 않겠어? 나 사무실에 혼자 있고 싶은데..」

 

 이렇게 직원들을 몰아내자시피 해 놓고 아차씨,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기에서는 점잖은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여보세요.」
 「아, 저, 죄송하지만 윤 박사님이십니까? 」
 「네, 그렇소이다.」
 「안녕하십니까? 이런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죄송합니다. 」
 「괜찮습니다, 근데 댁은?」

 「예, 전 <주간인생>에 나오는 박사님의 <인생문답>을 애독하고 있는

    애독자의 한 사람입니다. 」
 「그러세요?」
 「응당히 편지로 문의말씀 드리는 게 도리이겠습니다만,

    제가 원래 글 쓰는 게 서틀구요, 시간도 없고 해서요.」
 「대신 전화를 건다 이 말씀인가요? 」
 「네, 괜찮으니다면 제 고민을 전화로 간단히 풀어 주신다면 그야말로

    백골난망이겠습니다. 」
 「........」
 「안 되겠습죠?」
 「말씀해 보시죠. 무슨 고민이신지?」
 「사실은 제가 암만해도 권태기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
 「권태기요? 」
 「네」
 「그러니까 결혼하신 지, 3.4년 되신 모양이죠? 」
 「아, 아닙니다. 3,4년에다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
 「결혼하신 지 십 3. 4년? 」
 「15년에 접어듭니다.」
 「근데 이제와서 권태기라..... 」
 「죄송합니다. 제가 원체 센스가 무뎌서요. 그래 저...권태기도 좀

    철을 비껴서 온 것 같습니다. 」
 「죄송할 건 없구요, 요즘 들어 부인을 대하는데 싫증이 나신다?」
 「네. 요새 집사람을 보게 되면 장점은 통 보이질 않구요, 단점만 보이지

    뭡니까? 」
 「보는 여자마다 다 이쁜데 부인만 박색으로 보이구요? 」
 「네, 하는 짓마다 칠칠치 못해 보이고 통.....」
 「용모나 맵시나 입은 옷이나 머리 모양이나, 심지어 하는 행동까지도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더라....」
 「네, 맞습니다. 어떻게 그런 매력없는 사람과 15년 동안이나 한 지붕

    밑에서 살아왔나 하고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

 

 그러자 상대방의 음성이 갑자기 엄숙해지는 느낌이었다.

 

 「댁은 지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군요!」
 「네? 큰 잘못을요?」
 「더구나 결혼한 지 15년이 더 됐으면서 말이에요!」
 「아니 전, 잘못을 저지른 기억이 없습니다. 이래 봬도 전 호인이란

    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입니다. 」
 「그렇다면 묻겠는데요.」
 「네..」
 「댁은 부인을 여자로 보십니까? 」
 「네, 물론 여자로 보죠!」

 

 그러자 상대방의 음성이 높아졌다.

 

 「그게 틀렸습니다! 」
 「네에? 틀리다뇨? 아니 그럼 집사람을 여자로 보지 말고 남자로 보라는

    얘기십니까? 」
 「남자로 보라는 건 아니죠!」
 「아니 그럼 집사람이 여자지 누구란 말입니까? 」
 「부인은 단순한 여자가 아닙니다. 단순한 여자로 보니까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겁니다! 」
 「아니 그럼 무엇으로 보라는....」
 「부인은 여자 이상의 존재입니다. 」
 「여자 이상의 존재라구요?」
 「그래요. 부인은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 여자 이상의 존재, 당신의

    아내이자, 은인이라는 사실을 아세요.」
 「뭐라구요? 저의 아내이자 저의 은인이라구요?」
 「그래요, 부인께선 댁의 은인이십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그럼 아마 권태기니 뭐니, 그런 실없는 낱말은 쑤욱

    들어가고야 말 거예요. 자,그럼 난 바빠서 이만....」
 「은인? 은인....」

 

그 날 밤이었다. 아차씨는 여전히 취해서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여보, 나 돌아왔소!」

 

 문을 열어 준 아차부인, 참는 데도 분수가 있었다. 말투부터가 거칠다.

 

 「흥, 또 걸치셨구려!」

 

 그러자 아차씨,

 

「마셨지. 허나 오늘 마신 술은 달라. 들어 가자구요. 할 얘기가 있으니까! 」


 방에 들어가자 아차씨는 다짜고짜 두둑한 선물꾸러미 하나를 아내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서 물기있는 목소리로,


 「여보!」

 

 아내의 손을 더듬었다.

 

 「왜 이래요!」

 

 아차부인, 손을 뿌리친다. 그러나,

 

 「미안하오., 용서하구려. 내 잠시나마 당신 은혜를 잊은 걸! 」
 「뭐예요? 은혜를 잊어요?」
 「그래요, 당신은 내 다시없는 은인인데, 내 그걸 그만 잠시 잊구 객쩍은

    생각을 했구려!」
 「?」
 「그래. 당신은 내 은인이야. 당신 없었음 내 어찌 됐을까? 당신 없었음

    이나마 오늘의 내가 어찌 있었겠소? 당신 아니면 어느 누가

    꾀죄죄하니 희망없이 사는 노총각을 남편으로 받아 들였을 것이며,

    당신 아니면 어찌 박봉에다가 말단에다 술이나 마시고 실없는 짓만

    하는 나 같은 걸 남편으로 깍듯이 받들었겠으며, 당신 아니면 어찌

    나의 다시없는 영리하고 귀여운 옥희를 낳아 주었을 것이며......」
 「.......」
 「당신 아니면 어느 누가 과로로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나를 따뜻하게

    간호를 해줬을 것이며.... 」
 「.......」
 「당신 아니면 어찌 이 못난 남편이 승급에 누락되고 친구한테 낙오돼도,

    그 때마다 웃음으로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겠소 .....」
 「아이참 이이가?」
 「당신은 은인이야! 나의 은인이야! 여자이기 전에 나의 아내요 여자

    이상의 존재야! 그런 당신을 내가 소홀히 하다니..... 」

 

 취기가 돌아 제대로 안 돌아가는 혀로 이렇게 늘어놓는 아차씨의 넋두리, 그래서 처음엔 웃음까지 나오려 했는데, 마침내는 아차씨도 아차부인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소리까지 촉촉이 젖고 말았다.
          

                              박서림 방송꽁트집 <아차부인.재치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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